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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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
Flag of North Korea.svg Emblem of North Korea.svg
인공기 국장
표어강성국가[1]
국가애국가
북한이 불법 점거중인 지역
북한이 불법 점거중인 지역
수도(자칭) 평양 북위 39° 2′ 동경 125° 45′  / 북위 39.033° 동경 125.750°  / 39.033; 125.750
북한 (북한)
정치
정치체제단일국가, 1인 독재, 단원제, 공화제, 집단지도체제
입법부최고인민회의
집권여당조선로동당
국무위원회 위원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내각 총리
중앙재판소장
김정은
최룡해

김덕훈
최근영
역사
 
 • 독립1945년 8월 15일
 •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1946년 2월 16일
 • 북조선인민위원회1948년 7월 8일
 • 정부수립1948년 9월 9일
 • 주체사상 제정1972년 12월 27일
지리
면적120,540 km2 (96 위)
내수면 비율0.1%
시간대KST (UTC+9)
DST없음
인문
공용어한국어(자칭 조선어[a])
공용문자한글(자칭 조선글)
인구
2023년 어림증가 26,072,217명
2021년 조사증가 25,660,000명 (55위)
인구 밀도212명/km2 (45위)
경제
GDP(PPP)2016년 어림값
 • 전체$480억 (101위)
 • 일인당$1,800 (152위)
GDP(명목)2016년 어림값
 • 전체$1,300[2] (142위)
통화 도 사용 (KPW)
기타
ISO 3166-1408, KP, PRK
도메인.kp
국제 전화+850
1 헌법상 국가 원수 및 최고지도자.
UN Protocol and Liaison service

북한(北韓, 영어: North Korea 노스 코리아)은 소련-러시아와 중국의 비호로 한반도 북부 지역을 불법점거하고 무단으로 지배하고 있는 국가의 탈을 쓴 반국가단체이다. 이 반국가단체가 국가가 아니라는 것은 문재인 정부도 인정하는 부분[3]이다. 이 반국가단체는 스스로를 김정은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金正恩의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 영어: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under Kim Jong Un)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이 반국가단체는 김정은이 사실상 군주로 군림하는데도 자기네들의 공식적인 군주가 없다는 이유로 이 반국가단체는 스스로를 김정은의 공화국라고 약칭한다.

평양시가 이 단체가 지배하는 지역의 중심지로 이 반국가단체에서는 평양시를 혁명의 수도라고 칭하고 있다. 이 반국가단체가 지배하는 지역의 인구는 UN 기준 2,563만 명으로 추정된다. 이 반국가단체는 자신들이 지배하는 지역의 공용어를 문화어로 정했으며, 이 반국가단체는 문화어가 평양말을 기초로 형성되었다고 선동선전하지만, 실제로는 서울말에서 상당부분이 유래되었다.

원래 유엔 총회결의 제112호로 인해 한반도에 인구비례로 총선거를 열기로 했으나 소련(現.러시아)은 이 결정을 거부하고 김일성 일당과 함께 반국가단체를 세웠다. 즉, 이 반국가단체는 소련이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며, 이후 1950년 6월 25일, 유엔 총회 결의 제195호를 무시한체 한국을 불법 남침하여 6·25 전쟁을 일으켰다. 이 반국가단체는 여전히 중국과 소련 시절을 포함한 러시아의 비호를 받고 있으며, 대한민국의 유일한 48년 유엔 총회 결정의 존재와 핵실험등 각종 막장 행각의 벌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러시아의 비호로 인해 국제법상으로는 국가로 인정받고 있다. 이것은 중공이 국력을 이용한 갑질로 인해서 중화민국이 국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과 대조된다.

애시당초 이 반국가단체는 중국과 러시아만 없었으면 국제법상으로 국가 인정은 받지 못하는 것은 물론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전술했듯 태생부터가 유엔 총회를 무시한 체 소련의 비호로 세워졌으며, 이 반국가단체가 지속적인 대북제재에도 버티는 이유는 중국과 러시아가 이 반국가단체를 비호하기 때문이다. 러우전쟁 발발 이전에는 그래도 묵시적으로 비호했고 타협한 제재안이라도 받아줬으나, 러우전쟁 발발 이후에는 아예 대놓고 중러가 이 반국가단체를 비호하고 있다. 이는 어찌보면 이재명이 정통 리버럴 성향은 고사하고 김대중 정신과 노무현 정신에 거리가 한창 먼 정치인인데도 불구하고 이해찬과 민평련 등 이권이 우선인 민주당내 운동권의 비호로 인해 정치생명을 유지한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다.

명칭[편집 | 원본 편집]

전술했듯 이 반국가단체는 자신들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칭하고 있다. 이 반국가단체는 자신들을 조선이나 공화국으로 줄여서 부르고 있다. 이 반국가단체의 동맹인 중화인민공화국에서도 조선이라는 명칭이 통용되며, 한술 더 떠서 중국에서는 한국을 아예 조선이라는 명칭으로 부른다.

대한민국에서는 이 반국가단체를 북한이라고 주로 호칭한다. 북한이라는 명칭은 중국과 러시아의 비호로 나라 노릇을 하는 북한을 나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어, 이 반국가단체에서 발작하는 명칭이다.

역사[편집 | 원본 편집]

1945년 이전[편집 | 원본 편집]

이 반국가단체는 당연히 과거 한국사도 자기들의 역사로 여긴다. 고구려와 고려의 수도가 이 반국가단체가 지배하는 지역 안에 있으며, 당연히 고구려와 고려 유적이 많다.

반국가단체의 설립과 6·25 전쟁[편집 | 원본 편집]

모두가 알다시피 8·15 광복 이후 북위 38선 북쪽에는 이 반국가단체의 대부인 소련군정이 들어서게 된다. 소련은 남북한 단독 선거를 정치공학적 이유로 거부하고, 김일성이 중심이 된 조선로동당 일당은 이재명이 추미애의 비호를 받고 경기도지사 후보가 되었듯이 소련의 비호를 받고 자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국가의 탈을 쓴 반국가단체를 설립하였다. 북한은 1948년 12월 12일 총회에서 채택된 결의인 유엔 총회 결의 제195호(The problem of the independence of Korea)에 대해서 반발의 드러냈고, 북한의 대부인 소련은 이 결의안을 반대하였다.

소련의 비호로 세워진 이 반국가 단체는 적화통일 야욕을 보였으며, 남한에 공급되던 전력을 일방적으로 끊어버렸다.이 문장 쓰면서 그분의 “내가 끊어버릴거야. 예의가 없어. 안해”와 “안해, 다 커트야”라는 말이 필자의 머리에서 떠올렸다 이후 이 반국가단체는 전술한 유엔 결의를 무시하고 적화통일을 위한 전쟁 준비를 했다.

1950년 6월 25일 이 반국가단체는 한반도 유일의 합법적인 정부인 대한민국을 무력으로 침공하였다. 미국의 안일함과 이승만 정부의 무능함으로 북한은 영남 일부 지역을 제외한 대한민국 전지역을 점령하지만, 이후 미국의 참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강계시가 있는 자강도 지역으로 밀려나게 되며 혜경궁 김씨 사건 등으로 인해 벼랑 끝 위기에 몰렸던 이재명 처럼 벼랑 끝 위기에 몰리게 된다.

하지만 추미애이해찬이재명을 비호함으로써 혜경궁 김씨 사건 등으로 인해 벼랑 끝 위기에 몰린 이재명을 살려주다시피 한 것 처럼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앞세운 지원으로 이 반국가단체를 살려주다시피 해줘서 안타깝게도 이 반국가단체는 6·25때 해산되지 않았으며, 이후 북한과 중공군은 유엔군을 상대로 1953년에 정전협정을 맺었다.

김씨 왕조 독재 체제의 확립[편집 | 원본 편집]

김일성의 초상화
북한의 1대 지도자인 김일성혹부리우스초상화를 빙자한 혐짤

6·25 전쟁 이후 김일성은 자신은 6·25 전쟁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고 아랫사람한테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숙청하였다. 이 과정에서 숙청당한 인물 중 한명이 리승엽인데 이 사람은 유엔군과 한국군에 끝까지 맞서 싸운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낙연이 총괄선대위원장을 맡아서 이재명을 도왔는데도 불구하고, 6·25 전쟁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은 김일성 처럼 이재명 본인은 대선 패배의 최대 원흉인데도 불구하고 아무 책임도 지지 않은 체 이재명계한테 대선 패배 원흉으로 찍히고 아직도 찢빠들한테 민주당 사람이 아닌 국힘 성향을 가진 사람이라며 국힘으로 가라는 비아냥을 들었듯이, 리승엽도 미제 간첩 혐의를 뒤집어쓰고 숙청되었다.

이후 김일성은 반대파를 숙청했다. 이재명이 사사오입 사건 이후로 민주당을 완전히 장악했듯[b], 김일성은 8월 종파 사건 이후로 조선로동당과 북한이라는 반국가단체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김일성이 반대파를 숙청하고 1인 독재 체제를 확립한 후인 1972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회주의헌법이 공포되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을 "자주적인 사회주의 국가"로 규정해 혁명의 단계가 인민민주주의 혁명 단계에서 사회주의 혁명단계로 넘어왔음을 명확히 했다.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부(수도)는 서울시다"라는 내용에서 '서울'을 '혁명의 수도'인 '평양'으로 바꾸었다.
  • 조선로동당의 우월적 지위 명시
  • 사회주의적 소유제도의 확립
  • 주체사상의 헌법 규범화
  • 국가주석제 도입 및 권한 강화
  • 집단주의 강조(조직적체계)

이 헌법의 가장 큰 특징은 국가 권력을 국가원수인 주석에게 몰아준 것이었다. 즉 내각수상을 주석으로 그 이름을 바꾸고, 주석에 직속된 중앙인민위원회에 행정, 입법, 사법의 모든 권한을 집중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같은해 대한민국에서 10월 유신이 이루어진 것에 대한 대응이기도 했는데, 사회주의헌법은 수령 유일체제의 법제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사학자 김당택은 주체사상 채택을 비판하였다. 그는 본래 북한에 수령이라는 직책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였으며, 그러함에도 김일성은 북한(이라는 반국가단체)을 수립할 당시부터 수령으로 호칭되었다고 비판했다. 이어서 그는 이러한 수령이 점차 신격화되기 시작했다고 비판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일본 제국의 천황과 흡사하게, 종교적·신화적인 요소를 수령제도에 가미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러한 수령의 영도를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수령 유일체제로서, 수령인 김일성을 중심으로 전체 사회를 일원적으로 편제했다. 수령은 위대한 사상과 탁월한 영도력, 그리고 지고의 인격을 지닌 절대적인 존재이므로, 수령의 교시는 무조건 복종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사회주의헌법의 요지다. 이후 김일성의 사상은 주체사상으로 명명되었다. 따라서 주체사상은 김일성의 유일체제를 옹호하는 이론으로 변모해 갔다.[4]

사회주의헌법이 공포된 이후에 열린 6차 당대회에서 김정일이 김일성의 후계자임을 공인되었다. 동시에 주체사상 또한 공인되었다.

김일성1994년 당시 대한민국의 대통령김영삼과 만나 대담하기로 약속했으나, 그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결국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은 이때에 성취되지 못하였다.

김정일 시대[편집 | 원본 편집]

김정일의 면상 사진
북한의 2대 지도자인 뾰그리우스김정일의 면상 사진이자 혐짤

김일성이 사망한 이후 본격적으로 김정일이 집권하게 된다. 김정일이 집권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이라고 불리는 식량난이 터진다. 이로 인해 아사자가 대거 발생했으나, 김정일의 최우선 순위는 사실상 시민[c]이 아니었고 자신의 권력 그리고 사치였다. 김정일은 이재명이 윤석열 정부의 실정에도 불구하고 과반 이상의 의석을 가진 당을 자신의 방탄 수단으로 활용하듯이, 고난의 행군 와중에도 국가를 사치의 수단으로 이용했다. 김정일은 시민들이 굶어죽는 와중에서 온갖 진수성찬을 처먹었다. 김정일이 시민을 위해서 사치를 자제하고 식량 수급에 힘썼다면 고난의 행군 와중에도 아사자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며, 이와 마찬가지로 이재명이 과반수 이상의 제1야당을 방탄의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았으면 야당의 본연인 정부 견제도 더 잘되었을 것이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내용이지만 김정일 정권의 가장 큰 특징은 선군정치(先軍政治)를 내세웠다는 점으로 모든 것을 군 우선으로 하고 정치도 군 중심으로 하는 것이다. 김정일의 대표적인 직함이 바로 국방위원장인데 김정일때의 국방위원회는 그냥 나라의 모든 것을 틀어잡는 기관이었으며, 아직도 일부 나이 많은 사람은 북한의 최고 지도자가 국방위원장인줄 안다. 김정을 시대때는 당의 서열조차 군보다 낮았고, 당대회조차 한번도 열리지 않았다. 김정일 시대때 부터 북한의 핵개발 또한 본격화 되었고 2006년에 첫 핵실험이 있었다.

2000년 김정일은 북한 지도자 최초로 대한민국 대통령인 김대중 당시 대통령을 만나 6·15 남북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이를 기반으로 이후 금강산 관광, 개성 관광, 개성 공단 등의 남북 협력 사업 또한 시작되었다. 그러나 북한은 연평해전 등 대남 도발을 감행하였고 이는 민정당계 정당을 위시로 한 대북 강경파한테 빌미를 줬다. 2002년 미국은 북한의 악의 축으로 규정하여 북미관계가 악화되었고, 노무현 정권때 전술한 1차 핵실험을 감행하였다. 1차 핵실험 이후 남북관계가 현상유지만 될 정도로 냉각되었다.

참여정부(노무현 정부) 말기에 김정일은 평양에서 노무현 당시 대통령과 만나 10.4 남북정상선언을 발표하나 정동영과 좌적폐의 내부 총질로 인해 민주 정권을 유지하는데 실패하고 대한민국에 이명박 정부라는 보수 정권이 들어서게 된다. 이명박 정부는 비핵·개방·3000 이라는 것을 내세웠고 북한은 이에 호의적이지 않았으며, 이후 박왕자씨 총살 사건이 발생하여 이 후폭풍으로 금강산 관광 그리고 개성 관광이 중단되었다. 북한은 2009년 탄도 미사일 기술을 사용한 발사체인 광명성 2호를 발사하는 도발을 감행하게 되며, 대한민국의 초계함인 천안함을 어뢰로 격침시키고 같은 해 5월 2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이후 휴전 협정 이후의 최초의 영토 도발인 연평도 포격까지 감행하게 된다.

김정일의 건강은 갈수록 악화되었고 김정일은 후계자로 김정은을 지명하였다. 김정일은 죽기 전에 어떻게든 김정은 한테 권력 기반을 마련해 줄려고 거의 모든 치적을 김정은 한테 몰아주었다. 김정일은 2011년 심근경색 등으로 사망하였고, 김정일 체제는 막을 내리게 된다.

김정은 시대[편집 | 원본 편집]

김정은 사진
북한의 3대 지도자인 돼정은김정은의 사진이자 혐짤

김정일이 사망한 이후 그의 아들인 김정은이 집권하였다. 김정은의 집권 초기에는 단체 내에서 정치적 입지가 약했는데 그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서 선택한 것은 공포 정치. 자신의 권력에 방해라도 된다 싶으면 숙청하였다. 김정은 초기 때의 대표적인 숙청은 그의 고모부인 장성택에 대한 숙청이었으며 장성택 군인 신분이었기에 군사재판으로 신속하게 사형 판결을 받은 다음 어떻게 사형이 집행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총살당했다는게 정설이다. 고모부를 죽인 것도 폐륜적인데, 이 반국가단체는 최고 지도자의 이북형인 김정남을 체제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그것도 공공장소에서 독가스를 쓰는 방식으로 암살하였다. 그 외에도 현영철 등 여러 정적들을 죽이거나 정치범수용소에 처넣었다.

김정은은 아버지의 선군정치의 당 중심으로 복귀시켰다. 국방위원회를 없애고 국무위원회로 개편한 뒤 자기가 국무위원장 자리에 올랐고, 당대회도 7차 당대회 이후 5년 주기로 열리고 있다.

내용주[편집 | 원본 편집]

  1. 북한에서는 자기네 표준어를 문화어라고 한다. 다만 한국어 전체에 관해서는 조선어라고 한다.
  2. 이재명의 민주당 장악은 사사오입 사건 이전에도 현재진행형이었지만, 이재명이 당을 장악하게 된건 사사오입 사건 이후 시점이다. TMI지만 사사오입 사건 이후 당을 장악한 이재명은 정동영 등을 복당시켰다.
  3. 전술하듯 북한은 국가가 아니기에, 국민이 아닌 시민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참조주[편집 | 원본 편집]

  1. “2019년 김정은 신년사, 여섯 가지 특징”. 데일리NK. 
  2. https://www.bloomberg.com/news/articles/2017-07-21/north-korea-s-economy-rebounds-from-drought-amid-missile-focus
  3. BBC 뉴스 코리아 (2018년 10월 26일). “남북 관계: 북한은 국가일까 아닐까?....북한 국가 인정이 논란이 되는 이유”. 《BBC 뉴스 코리아》. 2023년 8월 30일에 확인함. 
  4. 김당택, 《우리 한국사 (정치사 중심의 새로운 한국 통사)》, 푸른역사, 5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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