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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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盧武鉉)은 대전지방법원 판사 출신으로 인권변호사, 제13·15대 국회의원, 제6대 해양수산부 장관, 그리고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을 역임했다. 그의 경력에 대해 많은 사람이 인권변호사 출신이라고는 이야기하지만, 판사 출신이었다는 점은 잘 언급하지 않는 편이다.

동서화합, 균형발전이라는 시대정신을 기치로 내세웠다. 또한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부당한 언론의 공세에 굽히지 않았다.[1] 그러면서도 변화하는 정세에 관해 유연한 자세를 잃지 않고 대응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지향했던 세상은 사람 사는 세상이다.

별명으로는 노짱, 노통, 꿈과 희망의 군국주의자, 노공이산 등이 있다.[2]

그의 삶은 마침표를 찍었지만, 그의 정신은 아직 마침표를 찍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노무현의 시대를 살고 있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노무현 정신은 정치권에서 남용되다시피 쓰이는 말이다. 대개 이 정신을 떠받들겠다거나 생전엔 야박하게 굴더니 뒤늦게 재평가하겠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그런 말을 하는 사람치고 그의 정신을 제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아예 거의 없다는 말이 나온다.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노무현 정신이 어떤 것이라고 직접적으로 말한 적이 없지만, 그의 삶을 되짚어 나가다 보면, 노무현 정신이란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으리라.

유년기[편집 | 원본 편집]

1946년 9월 1일,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에서 막내로 태어났다.[3]

학창 시절[편집 | 원본 편집]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인권변호사[편집 | 원본 편집]

짧았던 판사 시절[편집 | 원본 편집]

1977년 8월 22일 사법연수원 7기를 수료한 뒤, 동년 9월 6일 대전지방법원에서 짧게 재직했다.

1978년 5월 5일 부산에 변호사 사무실을 열고 조세전문 변호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부림사건[편집 | 원본 편집]

부림사건은 영화 <변호인>을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물론 영화에서는 각색이 되었다.) 1981년 9월, 전두환 집권 당시의 학림 사건이다. 이때 노무현, 김광일, 문재인 변호사가 무료 변론을 맡았다. 구속자 전원 1983년 12월에 형 집행 정지로 풀려났다.

노무현·문재인 합동법률사무소 개업[편집 | 원본 편집]

1982년 9월 2일, 문재인 변호사와 노무현·문재인 합동법률사무소(현 법무법인 부산)를 열었다.

호헌반대[편집 | 원본 편집]

1987년 05월 20일, '호헌반대 민주헌법쟁취 범국민운동 부산본부'(부산국본) 발족식에서 상임집행위원장에 임명되었다.

6월 항쟁 참여[편집 | 원본 편집]

부산의 시위대열 선두에 섰다.

국회의원[편집 | 원본 편집]

1988년 4월 26일, 부산 동구에서 당선되며 5공비리특별위원으로 활동했다.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는 더불어 사는 사람 모두가 먹는 것, 입는 것 이런 걱정 좀 안 하고 더럽고 아니꼬운 꼬라지 좀 안 보고 그래서 하루하루가 좀 신명나게 이어지는 그런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이런 세상이 좀 지나친 욕심이라면 적어도 살기가 힘이 들어서 아니면 분하고 서러워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그런 일은 좀 없는 세상, 이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제142회 국회 사회문화 분야 대정부질의 중

삼당합당에 반발하며 김영삼과 결별하게 된다.

이의가 있습니다! 반대 토론을 해야 합니다!

연이은 낙선[편집 | 원본 편집]

종로에서 부산으로 내려와 허태열 후보를 상대로 초반에는 이기는 여론조사가 나왔으나, 지역감정을 자극한 허태열 후보에게 패배해 낙선하게 되었다.

제가 제일 해보고 싶었던 것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역사가 수천 년 내려오는 동안에 사람에 대한 적대감과 불신과 증오를 증폭시켜서 좋은 결과가 난 일이 없습니다. 저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 한 순간의 승리가 모든 것은 아닙니다. 결코, 결코 헛일 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 2000년 4월 14일, 부산 북강서을 선거사무실 해단식

낙선한 이후에도 김대중 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위해 방송에 나와 지지연설을 했다.

해양수산부 장관[편집 | 원본 편집]

<노무현의 리더십 이야기>에 잘 드러나 있다.

대통령 후보[편집 | 원본 편집]

경선에 뛰어든 계기[편집 | 원본 편집]

권력에 맞서서 당당하게 권력을 한 번 쟁취하는 우리의 역사가 이루어져야만이 이제 비로소 우리의 젊은이들이 떳떳하게 정의를 얘기할 수 있고 떳떳하게 불의에 맞설 수 있는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경선[편집 | 원본 편집]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을 가지고 사람을 이렇게 모략해선 안 됩니다. 저는 언론을 권력으로써 어떻게 흔들 생각도 없지만, 그러나 언론에게 고개를 숙이고 비굴하게 굴복하는 정치인은 되지 않겠습니다. 끝까지 맞서 싸울 것입니다. 도와주십시오! 제게 힘을 주십시오!

경선 승리 이후[편집 | 원본 편집]

정직하게 성실하게 사는 사람, 그리고 정정당당하게 승부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사회! 그런 아름다운 세상을 함께 만들어 봅시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정의가 이긴다는 믿음을 물려줍시다. 착한 사람이 이긴다는 믿음을 물려줍시다.
후단협 사태[편집 | 원본 편집]
이회창과의 대결[편집 | 원본 편집]
막판 정몽준의 지지철회[편집 | 원본 편집]

그것은 불과 대선일 2시간 전의 일이었다.

대통령[편집 | 원본 편집]

정책적인 부분(정책 수립, 경과, 비판, 반론, 결과 등)은 모두 참여정부 문서로. 참여정부 국정 운영백서를 참고할 것.

본 문서에서는 정치적인 면을 중심으로 다룬다.

당선[편집 | 원본 편집]

노무현 대통령 당선은 한국 현대사를 조망해보아야 비로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동정표나 운이 작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무엇보다도 본인의 실력과 지지자들의 헌신이 빛을 발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수많은 도전을 극복한 역량이 있습니다. 그리고 위기마저도 기회로 만들어 낸 지혜가 있습니다. 이 지혜와 이 저력으로 오늘 우리에게 닥친 도전을 극복해 나갑시다.

대북송금특검[편집 | 원본 편집]

노무현은 대북송금특검의 거부권을 사용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동교동계는 감옥을 가야 했다.

국회의 날치기 탄핵[편집 | 원본 편집]

십자포화[편집 | 원본 편집]

탈권위를 내세웠지만, 이것이 인간에 대한 존중이 결여된 식으로 실천되길 바란 것은 아니다.

총선 승리[편집 | 원본 편집]

탄돌이, 108번뇌

행정수도 이전 위헌 논란[편집 | 원본 편집]

지방균형 발전을 위한 포석으로 행정수도를 이전하려고 했으나 헌법재판소가 위헌이라고 판시했다. 문제는, 헌법재판소가 위헌으로 든 논거가 ‘관습헌법’이라는 것인데,[3] 과연 대한민국 수도가 서울이라는 게 관습으로 정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라크 파병[편집 | 원본 편집]

2004년에 진중권이 노무현 대통령을 저렴한 언어로 비난했다.

전작권 회수 추진[편집 | 원본 편집]

4대 개혁 입법[편집 | 원본 편집]

지선 참패[편집 | 원본 편집]

원포인트 개헌과 대연정 제안[편집 | 원본 편집]

대통령 5년 단임제인 헌법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개헌을 제안했다. 대연정 또한 제안했지만, 정치적 술수라는 비난만 듣게 되었다.

열린우리당 탈당[편집 | 원본 편집]

정동영에 의해 쫓겨난 셈이다. 이때에 대해 2011년에 문재인 당시 노무현 재단 이사장은 정동영이 노무현 대통령을 너무 아프게 했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4]

2007년 대선[편집 | 원본 편집]

정동영 선거 캠프에 있었던 이재명이 인터넷에서 노무현 대통령을 신랄하게 비난하면서 정동영의 당선을 확신했다. 그러나 알다시피 정동영은 역대 대선에서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대참패를 겪었다.[4]

김용민은 정동영 참패의 이유를 <똥물만도 못한 친노>라는 제목으로 올린 칼럼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정치를 못한 탓’으로 돌렸다.(2007년 12월 28일 <김용민 칼럼>)[5]

퇴임 후[편집 | 원본 편집]

봉하마을로[편집 | 원본 편집]

국가기록원[편집 | 원본 편집]

박연차 게이트[편집 | 원본 편집]

서거[편집 | 원본 편집]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서거하셨다.

서거 직전의 상황[편집 | 원본 편집]

<누가 노무현을 죽였나>에서 당시의 상황을 조금 알 수 있다.

정치적 타살[편집 | 원본 편집]

실제로 타살이 아니냐는 의심이 적어도 인터넷상에서는 팽배해졌다.[6] 그러나 경찰은 자살로 결론내렸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 까닭으로 믿었던 자들의 배신, 자신으로 인해 궁지에 몰린 지인들, 세상에 적투성이라는 고립감 등을 거론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실체적 진실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노무현 단 한 사람뿐이다. 그렇더라도 정치적 타살이라는 데에는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후폭풍[편집 | 원본 편집]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로 인해 결국 진성 친노는 결집했다. 그리고 그의 친구인 문재인이 정치 입문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문재인은 정치판이 더러운 것을 잘 알았기에 정치판에 드나들 의사가 없음을 명확히 했으나, 노무현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 두 대통령의 서거로 정치에 뛰어들 결심을 굳혔다.[7]

뒤늦게 드러난 결백[편집 | 원본 편집]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후 검찰과 국정원을 비롯한 정부기관이 합작하여 그를 몰아세웠음이 여러 차례 밝혀졌다.

노무현 정신이라는 숙제[편집 | 원본 편집]

일반인이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이루었다. 그런데 왜 피부에 와닿지 않을까? 이에 대해선 이명박 정부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 아무튼 잘못했다는 공허한 비판에 시달렸다.[8] 서거 후에는 노무현 정신을 이어받겠다고 떠든다.

노무현 없는 노무현 재단[편집 | 원본 편집]

노무현 재단은 그를 기리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실상 하는 일은 그런 목적과 거리가 멀다고 시민들이 느낀다. 왜냐하면 인터넷에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 조롱이나 험담하는 모든 마타도어에 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 재단이 5.18 재단의 반의 반의 반의 반의 반만이라도 따라했으면, 과연 인터넷에서 저열한 말이 나돌 수나 있을까?

박해와 성역화[편집 | 원본 편집]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공정한 평가가 이루어지기 어려운 까닭은, 서거한 지 10여년이 훨씬 더 지난 오늘날에도 그는 대한민국에서 박해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성역화는 없다”, “성역화하지 말라”는 이들이야말로 노무현 대통령 성역화에 앞장서고 있다는 아이러니는, 노무현 대통령을 여전히 박해하는 자들의 지능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9]

한편 노무현 대통령께서 살아 계셨을 무렵에는 그에게 원한을 품은 듯이 비난에 앞장섰던 자들이, 서거 이후 갑자기 모든 과거를 없는 셈치고서 그의 정신을 기린다거나 추모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가령 추미애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는데도 이제는 자기가 노무현이라는 망발을 서슴지 않았다.[10] 정동영은 노무현 대통령의 사진을 민주평화당 당사에 걸어놓았다.지가 쫓아냈으면서. 김무성은 노무현 대통령 임기 시작부터 자기 마음속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발언했는데,[5] 봉하마을에서 환영받지 못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친노는 남아 있는가?[편집 | 원본 편집]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했던 많은 이들 중 진정으로 친노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오늘날 거의 안 남았다. 그리고 아직 친노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친문이 다 되었다. 그렇지만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가 친노를 언급할 때에는 좋은 의미가 아닐 때가 많다. 왜냐하면 자칭 친노 중에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위기에 빠졌을 때 아무도 나서서 구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대로 된 친노는 친문으로 거듭났기에 친문이 친노를 언급할 때는 변질된 쪽의 친노 혹은 친노인 줄 알았지만 친노가 아니었던 사람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권순욱은 아예 구친노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런 류에 해당되는 사람은 이해찬, 유시민 등이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언급하면서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전혀 먹히지 않는 이유도 이런 까닭 때문이다. 또한 이런 자들은 하나같이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난했던 자들이라는 점에서도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비난은 효과가 없을 수밖에 없다.

진정한 친노는 이제 친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을 지키는 쪽이 노무현 정신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쪽이다. 친문이 아니면 친노라고 할 수 없다.

노무현 없는 노무현의 시대[편집 | 원본 편집]

유시민과의 대화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진 이 말은,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터져 나온 민심의 불꽃이 촛불혁명으로 이어졌고 이것이 결국 박근혜 탄핵과 문재인 정부 탄생을 이끌어내어 재조명 받게 되었다. 또한 영화 <노무현입니다> 후반부에도 나온다. 유시민은 이때 자신이 했던 말을 후회한다고 언급했다. 그걸 후회하는 사람이 그래?! 도대체 진영논리가 얼마나 사람을 망친 거냐..

뒤늦은 파도[편집 | 원본 편집]

2012년에도 문재인 당시 국회의원은 대통령 후보로 나왔지만, 박근혜에게 석패당했다. 그리고 시간이 좀 더 흘러 박근혜 탄핵과 촛불혁명이라는 시대정신이 끝내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을 대통령으로 당선케 했다.

반노·반문패권주의의 참칭과 위기[편집 | 원본 편집]

자칭 전투형 노무현이라는 이재명[11][12]에 대해 정동영을 가리켜 곶감 운운했던 유시민이 아무튼 친노라고 치켜세워준 적이 있다.[13] 이해찬[14] 또한 이재명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내비친 적이 없다.

그런데 2021년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경선에서 이재명이 선출된 이후,[15] 민주당은 문재인 대통령을 전혀 돕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여러 정책에 대해 비난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16][17] 이로 인해 민주당의 지지율은 처참할 정도로 떨어져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국민의힘 지지율>더불어민주당 지지율 형태로 굳어지고 있는 형국이다. 그래서 민주당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전혀 지켜주지 않은 사람들로 인해 이 시대가 끝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파도야 들어올 때도 있지만, 나갈 때도 있으니.

여기서 더 나아가 몇몇 사람들은 노무현 정신이 민주당 내 반노·반문 세력에 의해 오염되는 것이 아니냐고 우려한다. 이참에 운동권 출신 정치인이 대한민국에서 박멸되어야 한다.

애도의 종료 시점?[편집 | 원본 편집]

영화 <노무현입니다>에서 유시민이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애도는 사회가 바로 잡힐 때 종료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사회가 바로 잡히더라도 노무현 전 대통령과 동시대를 살며 여전히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애도를 끝내지 않을 것이다. 그는 역사적 위인이 되었으며, 노무현 정신은 여전히 대한민국 사회에 절실하게 필요한 시대정신이기 때문이며, 그가 살아있을 때 지켜주지 못했던 책임을 어떻게든 져야 하기 때문이다.[18]

역대 선거 결과[편집 | 원본 편집]

가족관계[편집 | 원본 편집]

약력[편집 | 원본 편집]

대통령 기록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학력사항[편집 | 원본 편집]

경력사항[편집 | 원본 편집]

판사

변호사

국회의원

장관

대통령

상훈사항[편집 | 원본 편집]

저서[편집 | 원본 편집]

  • 여보 나 좀 도와줘
  • 노무현의 리더십 이야기
  • 노무현, “한국 정치 이의 있습니다”
  • 노무현이 만난 링컨
  • 성공과 좌절

관련 자료[편집 | 원본 편집]

  • 문재인의 운명
  • 누가 노무현을 죽였나
  • 사람이 있었네
  • 대통령의 글쓰기
  • 대통령의 말하기
  • 운명이다
  • 진보의 미래
  • 대통령 노무현의 1년~5년
  • 진보와 권력
  • 노무현이 꿈꾼 세상
  • 변호인(영화)
  • 무현, 두 도시 이야기(영화)
  • 노무현입니다(영화)
  • 시민 노무현(영화)
  • 노무현사료관
  • 참여정부 국정 운영백서 1권~8권

여담[편집 | 원본 편집]

  • 임기 중 누구보다도 마타도어를 당한 대통령이다. 반대 세력은 우파는 물론이거와, 자신들의 사상과 맞지 않는답시고 임기 내내 좌파로부터도 공격 받고 비난 받았다. 아직도 일부 좌적폐들은 노무현을 비난하고 있다.[19]
  • 이명박 정부가 국가기관까지 동원하여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하려고 노력했으나, 오히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인기는 박정희를 넘어섰다.[6][20] 노무현 대통령 재임시에 전폭적으로 지지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이 문재인 정부를 지탱해주는 마음으로 이어지고 있다. 비판적 지지는 아마추어나 하는 짓. 프로는 틀릴까봐 두려워하지 않는다.

각주[편집 | 원본 편집]

  1. 유시민은 영화 <노무현입니다>에서 이에 대해 유감스럽다는 듯이 말한 바 있지만, 그는 대통령이 함부로 질 수 없는 자리라는 것을 전적으로 간과했다. 유시민이 절대로 정치적으로 중임을 맡을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 글이나 쓰지 그랬어.
  2. 이 별명 중 일부는 일베 등에 의해 악질적인 의미로 쓰이게 되어 정작 지지자들이 더 이상 안 쓰게 되었다.
  3. 한양이 조선 시대의 수도였지만, 고려 시대에는 개성, 신라 시대에는 경주가 수도였다. 기간만 따지면 경주가 제일 길다. 나라가 바뀌면 수도도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데 왜 굳이 서울만 수도로서 기능할 수 있다고 ‘관습’을 들먹이며 못 박은 것인지 의도가 수상쩍다.
  4. 총득표차이는 2017년 대선을 통해 그 기록이 깨졌지만, 득표율차이는 여전히 깨지지 않았다. 2017년 대선이 박근혜 탄핵 이후의 대선이었다는 점에서 정동영의 대참패는 전무후무하다.
  5. 그런 그가 이번 대선에서는 이재명을 위해 앞장서고 있다.
  6. 가령 변호사를 했던 사람이, 더구나 판사까지도 했던 사람이 유서를 종이에 자필로 쓰지 않고 컴퓨터에 남겼는가라는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요즘도 꽤 있다.
  7. 마치 김어준이 문재인을 발굴했다는 듯이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엄연히 문재인은 이미 2002년에 노무현이 공개적으로 자신의 친구라고 언급했고, 정치권에서의 러브콜은 80년대 말부터 받은 사람이라고 봐야 한다. 더구나 김어준이 아무나 띄운다는 말도 있다. 100명 추천해서 1명 얻어걸려도 손해보지 않는다.
  8. 공허한 비판이란, 모든 잡다한 수식을 제거한 뒤에 실질적으로 남는 게 아무것도 없는 것을 말한다. 박근혜가 노무현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아무튼 서민들이 살기 어렵다고 잡아뗀 것이 대표적이다. 비판도 합리적이어야 뭘 수용하지 이런 식으로 비난하면 어쩌란 걸까? 박근혜 본인이 대통령 되자 아무튼 서민들이 살기 좋아졌다고 생각했는지 나라를 말아먹을 뻔했다. 그리고 탄핵당했다. 아몰랑의 원조답다.
  9. 성역화를 싫어하면서 성역화에 일조하는 이들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서도 똑같은 태도를 고수한다.
  10. 추미애는 탄핵 정국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사유로 책을 만들 수 있을 정도라고 비난을 퍼부은 바 있다.
  11. 2007년, 그는 여러 차례 인터넷에 노무현 대통령을 비난하는 글을 올렸다. 노무현이 지지하는 후보라면 그가 누구라도 지지하지 않겠다는 게 현실이라는 글도 썼을뿐더러 노무현 대통령이 하는 것이라면 싫다는 것이 국민적 정서라는 글도 썼다.
  12. 노무현 전 대통령을 싫어하면 누군가 전투형 노무현이라고 치켜세울 때 그런 소리는 하지 말라고 해야 정상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상황이 어려울 때는 온갖 비난과 저주를 퍼붓다가, 서거 이후 그의 대중적인 이미지가 좋아지자 거기에 편승하려고 하는 태도는 그가 전혀 노무현 정신에 대해 아무것도 배운 게 없다는 방증이며, 그는 결국 정동영과 통하는 사람일 뿐이라는 확신만 갖게 한다. 더구나 그를 가리켜 전투형 노무현 운운하는 사람은 그의 지지자밖에 없다. 즉, 정상인은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
  13. 그런 유시민이 문재인 대통령은 어어어 하다가 대통령이 되었다고 발언했다. 전혀 유머로 승화할 만한 말이 아니다.
  14. 2007년 6월에는 이해찬이 자신보고 친노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다.
  15. 여기에는 사사오입 논란 등이 있다.
  16. 열린우리당 때야 노무현 전 대통령 지지율이 떨어지고 레임덕도 겪었다는 변명이라도 할 수 있지만, 지금의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은 레임덕을 아예 겪지 않는 경이로운 지지율이다. 이는 민주화 이후 최초이다. 그런데 여당의 국회의원인 조응천은 여기에 대해 솔직히 대통령 지지율이 부담스럽다고 언급한 바 있다.[1] 대통령 지지율이 높으면 좋아해야 하는 게 여당 아닌가? 정신 차려! 걔넨 집권야당이야!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들의 정치감각이 어떤지 지금 여실히 알 수 있다.
  17. 참고로 문재인 정부는 무리수를 둔 적이 전혀 없다. 무리수는 민주당이 두고 있다. 오히려 이재명이 민주당을 이재명의 민주당으로 만들겠다고 공언한 이후로 본격적으로 당청 갈등이 커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 열린우리당은 100년 가는 정당을 만들겠다고 했지만, 결국 대통령 임기보다도 짧은 초라한 역사만 남겼을 따름이다. 정부는 업적을 남기지만, 당은 깨지고 털리고 실패하는 역사와 전통. 이해찬 역시 20년 집권을 언급한 바 있으나 당장 정권재창출 자체가 불투명해졌다. 아, 민주당아.. 나 너무 무서워.. 제발 그만 해! 이러다 우리 다 죽어!
  18.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문재인 대통령을 지키는 것이다.
  19. 이런 비난 때문에 나온 조어가 바로 좌파 신자유주의이다. 엥? 그거 완전 이재명 아니냐?
  20. 다만 최근엔 민주당 꼬라지 때문에 엎치락뒤치락 하고 있다.[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