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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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삼부제(二十三府制, 23부제)는 1895년 6월 23일(음력 윤 5월 1일)에 시행된 조선의 지방 제도로, 최상위 행정구역을 부(府)로 개편하고 그 하위 행정구역을 군(郡)으로 명칭을 통일하여 부군제(府郡制)라고도 부른다.

제2차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1413년부터 이어온 8도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8도보다 좀 더 세분화된 23부(府) 337군(郡)으로 분할한게 핵심이다.

개요[편집 | 원본 편집]

1895년 6월 18일(음력 5월 26일) 전국 8도의 감영, 안무영과 유수부 폐지에 관한 건(監營按撫營並畱守府廢止에關한件, 개국 504년 칙령 제97호)과 전국을 23개 부로 구획하고 종래의 부(府), 목(牧), 군(郡), 현(縣)으로 구분되어 있던 명칭을 군(郡)으로 통일시키는 것을 골자로 한 지방제도 개정에 관한 건(地方制度攺正에關한件, 개국 504년 칙령 제98호)이 반포되었다.

기존의 행정구역은 도 아래에 부·대도호부, 목, 도호부, 군, 현 등 다양한 등급의 행정구역이 혼재되어 혼란을 초래하고 있었으며 이를 부-군 체계로 이원화하여 행정의 효율을 높이고자 한 것이 개혁의 취지이다. 실제로 전통적인 8도 체제는 제정된 지 시일이 상당히 지난 탓에 도 간의 인구격차가 크고, 실제 생활권을 정확히 반영하지 못했다. 조선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남부지방이 겨우 3개 도(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통칭 삼남)로 편성된 데 비해 인구밀도가 희박하면서 면적이 거대한 북부지방은 2개 도(평안도, 함경도)로 편성되었고, 생활권이 서로 다르던 영동과 영서가 같이 강원도에 묶이는가 하면[1], 생활권이 비슷한 충주를 중심으로 한 남한강 수계 일대는 충청도와 강원도로 양분되는 문제를 야기했다.

23부제 개혁은 인구분포 및 생활권을 보다 실질적으로 반영하고, 지역편차가 큰 도를 더 작게 나누는 방향으로 실시되었다. 또한 각 부의 명칭을 정할 때 그 부 소속이 최대도시(부 소재지)의 이름을 차용했다.

이때 집권층의 성향이 그렇듯 같은 시기 일본의 폐번치현과 도도부현 체제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도 전통적으로 한국처럼 오기칠도라고 하여 전국을 7개 도로 나누었고 교토와 오사카 등 간사이 지역은 '긴키'라고 해서 별도의 행정구역으로 삼았던 것을 메이지 유신때 부와 현으로 개편하면서 광역행정구역의 이름을 소속의 최대도시(부 소재지)에서 차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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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을 23개의 행정 구획으로 나누고 이를 (府), 즉 관찰부(觀察府)라고 하였다. 부의 장관은 관찰사(觀察使) 혹은 부장관(府長官)이고, 그외 참서관(參書官) 1명과 주사(主事) 등의 직원을 두었다. 경무청이 설치되어있던 한성부를 제외한 나머지 부에는 경무관을 두고 경찰 사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또한 부장관에게는 예산의 범위 내에서 별도로 직원을 채용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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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사용하던 부, 유수부, 대도호부, 목, 도호부, 현 등을 모두 폐지하고 고을의 명칭을 군(郡)으로 통일하면서 군의 장관을 군수(郡守)라고 하였다. 당시에는 337군이었고, 가평군이 폐지되고 지도군, 완도군, 돌산군이 신설되면서 339군이 되었다.

모든 고을의 명칭을 군으로 통일했으나, 구역을 변경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면적과 인구의 차이가 심하여 각 군별로 1등부터 5등까지 등급을 매겨 군수의 봉급과 군청 소속 관리의 수에 차이를 두었다. 단, 한성군과 제주군에는 군수를 임명하지 않고 관찰사가 겸임했기 때문에 등급이 없었다.

지사서[편집 | 원본 편집]

23부가 설치되면서 기존 감리서가 폐지되고 외국과의 통상사무는 관찰사가 담당했다. 그러나 덕원군(원산항)이나 경흥군은 관찰사 소재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관찰사가 아닌 해당 지역의 군수가 담당토록 했는데, 군수가 있는 부청과 항구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관련 행정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러한 상황을 참작하여 1896년 1월 18일에 부청소재지가 아닌 개항장과 통상구에 지사서(知事署)를 설치하여 통상사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지사서의 지사는 기존 감리서 청사에 소재하면서 해당 지역의 군수를 겸임하였으며, 통상사무에 관해서는 관찰사와 같은 권한이 주어졌다. 1896년 8월에 감리서가 다시 부활하여 지사서 체제는 폐지되었다.

행정구역[편집 | 원본 편집]

관찰부 소재지 구역
한성부 한성[2]
인천부 인천 제물포[3]
충주부 충주
홍주부 홍주
공주부 공주
전주부 전주
남원부 남원
나주부 나주
제주부 제주
진주부 진주
동래부 동래 부산[4]
대구부 대구
안동부 안동
강릉부 강릉
춘천부 춘천
개성부 개성
해주부 해주
평양부 평양
의주부 의주
강계부 강계
함흥부 함흥
갑산부 갑산
경성부 경성

변천[편집 | 원본 편집]

  • 개국 504년(1895년) 7월 19일 칙령 제144호〈한성부 관할 내 포천군에 가평군을 합병에 관한 건〉에 의해 가평군이 폐지되어 포천군에 편입하였다.
  • 개국 504년(1895년) 9월 5일 칙령 제164호 〈군수관등봉급에 관한 건〉에 의해 면과 결호수의 다소에 따라 군을 1등군부터 5등군으로 구분하였다.
1등군 2등군 3등군 4등군 5등군 비고
한성부 양주, 광주, 파주, 교하 포천, 고양 적성, 영평, 연천 한성군 누락
인천부 강화, 교동 수원 통진 인천, 부평, 남양 김포, 양천, 시흥, 안산, 과천
충주부 충주 진천, 여주, 음죽, 이천 괴산, 제천, 청안, 용인, 죽산, 원주 음성, 연풍, 청풍, 영춘, 단양, 양지, 정선, 평창, 영월
홍주부 홍주 덕산, 한산, 서천, 임천, 홍산, 서산, 면천 결성, 남포, 보령, 해미, 대흥, 청양, 예산, 온양, 아산 비인, 당진, 태안, 신창, 정산
공주부 공주 청주 은진, 옥천, 평택, 직산, 금산 연기, 연산, 부여, 노성, 문의, 회덕, 보은, 영동, 천안, 안성, 양성 석성, 진잠, 회인, 청산, 황간, 전의, 목천, 진위, 진산
전주부 전주, 용안, 영광 김제, 고부, 태인, 무장 여산, 임피, 함열, 익산, 부안, 금구, 흥덕, 장성 고산, 옥구, 만경, 정읍, 고창
남원부 남원, 순천 담양 임실, 진안, 순창, 무주 구례, 운봉, 곡성, 광양, 장수, 옥과, 창평, 용담
나주부 나주, 영암, 광주 해남, 강진, 장흥, 흥양, 보성, 함평 진도, 무안, 능주, 남평, 낙안 화순, 동복
제주부 대정, 정의 제주군 누락
진주부 진주 김해 고성, 사천, 곤양, 하동, 거창, 함양, 합천, 의령, 함안, 창원 남해, 단성, 산청, 안의, 초계, 삼가, 칠원, 웅천 진해
동래부 경주 동래, 울산 기장, 언양, 연일, 흥해, 거제 양산, 장기
대구부 대구, 칠곡, 성주, 의성, 밀양, 영천, 창녕, 현풍 선산, 김산, 청도 경산, 인동, 고령, 개령, 의흥, 군위, 비안, 자인, 신녕, 하양, 영산 지례
안동부 상주 안동 예천 청송, 영덕, 영천, 순흥, 풍기, 함창, 용궁, 문경 진보, 영양, 영해, 청하, 예안, 봉화
강릉부 강릉 울진, 평해, 삼척, 고성, 간성, 통천, 흡곡, 양양
춘천부 춘천 양구, 홍천, 인제, 횡성, 철원, 평강, 김화, 낭천, 회양, 금성, 양근, 지평
개성부 개성, 풍덕, 평산 장단, 금천, 수안, 곡산 삭녕, 마전, 신계 이천, 안협, 토산
해주부 안악 해주, 봉산 연안, 배천, 옹진, 강령, 장연, 재령, 신천, 문화, 서흥 송화, 풍천, 장련, 은율
평양부 평양, 황주 용강, 중화 안주, 영유, 함종, 삼화, 강서, 영변, 순천, 성천, 상원 숙천, 순안, 자산, 덕천, 개천, 은산, 양덕, 강동 증산, 영원, 희천, 맹산, 운산, 삼등
의주부 의주 선천, 정주 창성, 벽동, 용천, 철산, 곽산, 가산, 박천, 구성 삭주, 태천
강계부 강계, 초산, 위원 후창, 자성, 장진
함흥부 함흥, 영흥, 단천 정평, 안변, 북청 고원, 이원, 홍원 문천, 덕원
갑산부 갑산, 삼수
경성부 길주 종성, 회령 경성, 명천, 경원, 무산 부령, 경흥, 온성

문제점과 폐지[편집 | 원본 편집]

도 체제의 한계를 극복하고 생활권을 반영한다는 취지로 좋았으나 탁상행정인 한계도 있었다. 예를 들면 충주부는 남한강 수계를 반영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충주에서 상당히 먼 용인군 및 정선군까지 관할하고 있었다[5]. 남원부는 전반적으로 섬진강 수계를 반영한 듯 하나 장수군 이북의 금강 수계에 해당되는 무주군, 진안군 등 현재의 전북 동부 산악지역까지 남원부에 편제함으로써 남북으로 길쭉한 관할구역이 형성되었다.

게다가 23부제가 실시된 지 1년도 되지 않은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이 벌어졌고, 개혁의 주체였던 친일 세력들은 참살당하거나 외국으로 망명하는 바람에 갑오-을미개혁 자체가 동력을 상실하였다. 결국 시행한 지 불과 1년2개월도 지나지 않은 1896년 8월 4일 종전의 8도제를 바탕으로 조선 남부의 3개 도와 북부의 2개 도를 남·북으로 나누는 13도제가 시행되면서 폐지되었다.

영향[편집 | 원본 편집]

잠시 실시되었지만 엄연한 역사적 사례이기도 해서 행정구역 개편 떡밥만 떴다하면 사례로 거론되는... 즉, 도 폐지론의 대안으로 거론되기도 한다. 특히나 백두대간 등 지형적인 이유로 생활권이 다른 강원도의 문제를 예시로 드는 경우가 많다.

절묘하게도 현재 북한 지역에 해당하는 부의 위치와 영역은 북한에서 현재 사용하고 있는 도 체제와 비슷하다. 남한 지역 부분의 경우 통일신라 때의 9주 5소경과 그를 이은 고려의 5도 양계와 비슷하다.[6]

각주[편집 | 원본 편집]

  1. 더군다나 백두대간이라는 지형적 영향이 컸다
  2. 본래 조선왕조의 도읍(서울)을 관장하는 한성부의 최고 관직은 판윤(判尹)이었으나, 23부제 실시 시기에는 한성부관찰사(漢城府觀察使)로 개칭되었다. 참고로, 23부제 실시 직전에는 부윤(府尹, 윤), 시행중에는 관찰사, 폐지 이후에는 다시 판윤, 1905년부터는 다시 부윤으로 운영되었다.
  3. 23부제 시행과 더불어 제물포에 있던 인천항 감리서가 폐지되었다. 그 청사에 인천부가 위치하였다.
  4. 기록에 따르면 과거 첨절제사의 군영이던 부산진(釜山鎭) 자리에 동래부가 위치하였다고 하나, 대한제국 관보 등재를 요청한 내부(內部) 관청의 문서에 따르면 초대 동래부 관찰사 지석영이 부임한 곳은 23부제 실시 직전에 폐지된 동래 감리서(동래 부산항 감리서) 청사였다. 이 청사는 지금의 부산광역시 영도구 봉래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5. 당시의 용인군은 현재의 성남시 분당구 남쪽과 현재의 기흥구에 위치해 있었는데 사실 거리를 감안할때 한성부에 편제될 위치라고 해도 무방하다.
  6. 사실 한국사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산천을 따라가며 고을의 경계를 그리기 때문에 시대를 초월해 비슷하게 갈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