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지 유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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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지 유키오 (山地 悠紀夫, 1983년 8월 21일 ~ 2009년 7월 28일)는 일본의 범죄자((살인, 성범죄)이자 오사카 자매 묻지마 살해사건의 범인이였던 인물이다. 2000년에 친어머니를 살해한 전과가 있는 상황에서 2005년 오사카 자매 묻지마 살해사건을 일으켰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유년 시절[편집 | 원본 편집]

야마지 유키오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인 유지(勇次)는 알콜중독자였고 야마지와 어머니인 키쿠에(菊江)를 툭하면 구타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1995년 1월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간경변으로 사망했다. 이후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교에 가지 않고 신문 배달부로 일했다.

첫 번째 살인[편집 | 원본 편집]

2000년 7월 29일, 당시 16세였던 야마지 유키오는 야마구치시에 살았던 50세의 친어머니를 살해하였다. 그는 금속 야구방망이로 친어머니를 폭행해 살해한 후 이틀 후에 자수하여 체포되었다. 그는 어머니가 자신이 사랑하는 소녀를 미워했으며, 거액의 빚을 졌다는 것을 살해 동기로 밝혔고 자신의 행위를 조금도 잘못했다고 생각하거나 반성하지 않았다. 야마지는 동정론에 호소하여 비교적 가벼운 처벌을 받았고 2003년 10월, 가석방으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 담당 정신과의사는 "(야마지가) 법률을 지키려는 생각이 없다."라고 이야기하는 등 갱생에 의문을 품고 있었다.

출소 이후 야마지는 2005년 2월경 파칭코 슬롯기계를 부정 조작해 코인을 훔치는 범죄그룹에 참가하지만, 그 그룹이 후쿠오카에서 오사카로 활동 거점을 옮긴 그해 11월 이후로 돈벌이가 시원치 않자 그룹에서 이탈하고 싶다는 뜻을 동료들에게 전하고 그룹을 나왔다.

두 번째 살인[편집 | 원본 편집]

야마지는 그룹에서 나온 후 2005년 11월 17일 오사카에서 한 자매를 습격했다. 2005년 11월 17일 오전 2시 반경, 먼저 음식점에서의 일을 끝내고 귀가하는 언니가 문을 내리는 순간 뒤에서 습격했으며 나이프로 가슴을 찌른 후 강간하였다. 약 10분 후 여동생이 돌아오자 여동생도 칼로 가슴을 찌르고, 언니의 바로 옆에서 강간했다. 그 후 베란다에서 담배를 핀 후에 자매의 가슴을 다시 찌르고 실내에 불을 지른 뒤, 현금 5000엔과 동전 지갑, 저금통 등을 빼앗은 다음 도주했다. 두 사람은 병원에 옮겨졌지만 곧 사망했다. 두 피해자는 모두 과거에 야마지를 만난 적이 없었다. 즉 묻지마 범죄였다.

오사카 경찰은 그 해 12월 5일, 건조물 침입 용의자로 야마지를 체포했으며 12월 19일에는 강도 살인 용의로 다시 체포했다. 이 사건을 보도받은 스기우라 세이켄 법무대신은 12월 20일의 내각회의에서 소년원 퇴소자에 대한 취업 지원책의 강화를 검토했다. 흉기로 쓰인 길이 12센치의 나이프는 야마지의 진술대로, 범행 현장에서 약 400미터 떨어진 신사부지내의 창고에서 발견되었다.

경찰 조사에서 야마지는 "어머니를 죽였을 때의 감각을 잊을 수 없었고 사람의 피가 보고 싶어졌다. 누구라도 좋으니까 죽이려고 했다"라고 진술, 변호사에게는 "쇼핑하러 가는 기분으로 사람을 죽이러 갔습니다"라고 말했다.

재판[편집 | 원본 편집]

야마지는 주거침입, 강도살인, 강도강간, 총기 및 무기류 소지 등 단속법 위반, 건조물 침입, 방화죄로 기소되었고 2006년 5월 1일에 첫 공판이 열렸다. 첫 공판에서 가해자의 진술이 검찰에 의해 공개되었는데, 그 내용은 사람을 찌를 때마다 성적 흥분을 느꼈다는 것이었다.

5월 12일, 제2회 공판이 열렸고 질문에 야마지는 "사람을 죽이는 일과 물건을 부수는 일은 완전히 같은 일"이라고 말했다. 모친 살해에 대해서도 질문받았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라고 대답했다. 6월 9일부터 10월 4일까지 정신감정이 실시되었지만, 10월 23일에 재판장은 아스퍼거 장애를 포함한 광범성 발달장애는 아니라고 판단하고 인격장애(비사회성 인격장애, 통합 인격장애, 성적 새디즘)라는, 야마지의 완전한 책임 능력을 인정하는 정신감정서를 증거로 채택한다.

10월 27일 제10회 공판에서는 법정에 2만 2796명이 서명한 사형을 요구하는 탄원서가 제출되었지만, 야마지는 "(탄원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추궁당해도 :아무것도..."라고만 대답했다. 11월 10일 오후, 변호측의 최종 변론 공판의 마지막에 재판장으로부터 의견 진술을 요구받았지만, 야마지는 "특별히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만 말했다.

2006년 12월 13일 오전, 오사카 지방법원에서 사형 판결이 내려졌다.사형 판결의 순간에도 야마지는 정면만 응시할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가해자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변호인이 넣은 노트에 "무엇을 위해서 태어났는지, 대답을 발견할 수 없다. 사람을 죽이기 위해 라는 것보다 더 좋은 대답이 있을까? 사람을 죽이고 싶다」라고 적었다. 판결 후 "항소할 생각은 없다"라고 변호인에게 이야기했지만, 12월 26일 변호인은 항소한다. 이 당시 야마지는 접견중에 "태어나지 않는 편이 좋았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고 한다. 2007년 5월 31일 야마지 본인이 항소를 취하하여 사형이 확정되었다.

사형 집행[편집 | 원본 편집]

2009년 7월 28일, 야마지는 오사카 구치소에서 또 다른 살인자인 마에우에 히로시와 함께 교수형으로 사형이 집행되어 처형되었다.

기타[편집 | 원본 편집]

야마지는 처형 당시 25세의 나이로 헤이세이 시대 이해 일본에서 처형된 가장 어린 범죄자가 되었다.

체포 이후 야마지의 외모가 공개되자, 언론은 "잘생긴 살인자"라는 이상한 칭호를 야마지에게 붙었고 그의 인생을 포장하여 불우한 서사를 부여하기도 하였다. 또한 일부 시민들은 야마지가 잘 생겼다는 이유로 그의 팬을 자처하기도 하였으며 심지어는 응원까지 하였다. 대한민국에도 범죄자 성별만 다르지 비슷한 사례가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