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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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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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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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예수교장로회의 양대 교단인 예장통합과 예장합동의 상징. 이 두 교단은 한국 장로회는 물론 한국 개신교 전체의 양대 교단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大韓耶蘇敎長老會)는 대한민국에서 칼뱅주의 개혁 신학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따르고 대의 민주주의 교회정치와 당회, 노회, 대회, 총회로 이어지는 대의적 질서에 따라 교회를 운영하는 개신교 교단들의 통칭이다. 일제 강점기 말에 해산되었던 조선예수교장로회가 1947년 재건된 이래 신학적인 입장의 차이 등 다양한 이유로 분파된 장로교 교파들이 과거 총회를 계승했다고 서로 주장하며 동일한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역사[편집 | 원본 편집]

토마스 선교사[편집 | 원본 편집]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조선은 1865년 영국 회중교회 소속의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목사로 인해 처음 접점을 갖게 된다. 토마스는 중국선교사로 파송받았으나 사임하고, 중국 산둥성에 체류할 때 장단군에서 건너온 조선 천주교인 두 명을 만나 조선 사람도 한문성경을 잘 읽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선 선교를 결심한다. 이후 그곳에 거주하고 있던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선교사 겸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총무였던 알렉산더 윌리엄슨 선교사를 만나 이 뜻을 전하고, 격려와 함께 스코틀랜더 성서공회 총무직으로 과견할 것과 약간의 여비도 약속받는다.[1]

그리하여 천주교인 두 명의 안내로 중국 목선을 타고 그해 9월 4일 연태를 출발하여 13일에 황해도 해안에 상륙한다. 그로부터 약 2개월동안 해안가를 돌아다니며 전도한 후 이듬해 돌아오기로 이야기하고 베이징으로 돌아간다. 베이징에서는 조선사신일행을 만나 성경을 전달하고 공친왕 혁흔으로부터 소개서신도 받았으나, 흥선대원군이 천주교도를 박해하는 것을 고려한 런던선교사들과 친구들의 반대를 받는다. 그러나 토마스 목사는 윌리엄슨 선교사에게 이야기하여 성경 여러부를 챙기고 톈진으로 가서 조선으로 향하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에 탑승한다.[1]

이후 대동강을 거슬러 오르며 한문성서를 강가의 주민들에게 전달하였으며, 평양에서는 관원들에게도 복음을 전하였다. 결국 대동강을 따라 올라가며 제너럴셔먼호 사건 당시 사로잡혀 순교당하며, 살해하는 군인에게도 성경을 전달했다고 전해진다.[1]

정식 포교의 시작[편집 | 원본 편집]

호러스 뉴턴 알렌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그러나 정식으로 개신교 포교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1884년 9월 20일 미국 북장로교 소속의 호러스 뉴턴 알렌(안연)이 조정에 의사로 들어오고 1885년 마찬가지로 북장로교 소속의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원두우)와 존 헤론이 들어와 미국 북장로회조선선교회를 조직한 후였다. 성경은 존 로스가 중국에서 1870년대 번역한 것을 영국성서공회와 스코틀랜드 성서공회가 1886년에 처음으로 인쇄 및 발행한다.[2]

1889년에 캐나다인 제임스 게일(기일) 목사와 호주장로회조셉 헨리 데이비스가, 1890년에는 새뮤얼 오스틴 모펫(마포삼열) 목사가 들어온다. 1891년에는 이사벨라 멘지스, 진 페리, 메리 포세트 등 여선교사가 호주에서 도착했고, 1893년에는 제임스 맥켄지 의사가, 1898년에는 캐나다장로회에서 로버트 그리어슨(구례선) 의사 부부, 푸트(W. R. Foote) 목사부부, 맥레(MacRae) 선교사가 도착하여 선교에 종사한다.[3]

맥켄지 의사는 황해도 소래교회에서 전도와 의료에 종사하다가 1년 반만에 사망했고, 이 부음에 감동하여 도착한 전기오가 원산에서 캐나다장로회조선선교회를 조직한다. 미국 남장로회에서는 1892년 윌리엄 데이비스 레이놀즈(이눌서) 목사부부와 테이트(최의덕, Lewis B. Tate) 목사, 윌리엄 전킨(전위렴) 목사 부부가 도착하여 전라도에서 남장로회조선선교회를 조직한다.[3]

이상과 같이 네 개의 장로회 선교사가 각기 입국하여 네 개의 선교회를 조직하고, 각각 구역을 정하여 선교사업에 종사하면서 교회를 설립하였다. 교회의 통일과 치리 문제를 다루기 위해 1889년 선교사들로만 구성된 장로회공의회를 조직하였는데, 북장로선교회와 호주빅토리아선교회뿐인 관계로 명칭은 장로교미슌연합공의회라 하고, 회장으로는 존 헤론을, 서기로는 데이비스를, 회원으로는 원더우드, 안연 등을 두었다. 다시 1893년에는 명칭을 고쳐 장로회미슌공회라 하였다. 이때까지도 아직 조선인은 참가하지 못하고 외국인 선교사로만 조직되었다.[3]

1901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조선인들과 선교사가 합쳐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를 조직한다. 마포삼열은 평양에 대한예수교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이 되었는데, 1907년 여기서 제1회 졸업생으로 길선주, 양전백, 한석진, 이기풍, 서경조. 송인서, 방기창의 7인이 7교회를 세우고 7노회를 만들어 한국의 초대교회가 자립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한다. 조선인 목사와 장로가 배출됨에 따라 1907년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립노회가 조직되고, 1912년에는 제1회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가 성립되어 헌법, 정치를 제정하였다.[2]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의 시대[편집 | 원본 편집]

길선주 목사의 사진

조선교회의 장로선거는 1900년부터 시작되었다. 이 해에는 황해도에서는 서경조, 평안남도에서는 김종섭과 이영은이 선출되었으나 이영은은 안수 이전에 사망한다. 이듬해 길선주, 방기창이 장로로 세워져 이 때부터는 선교사들로만 공회가 조직되어있었으나 1901년부터는 조선인 대표도 참가하여 조선야소교장로공의회를 조직한다. 그러나 이 때까지 교회의 치리권은 선교사공의회에만 있어서 이 공의회는 친목기관에 불과했다. 1902년에는 양전백이 장로로 세워지고, 1903년부터는 더 많은 인원들이 선출된다.[4]

1901년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조선인들과 선교사가 합쳐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를 조직한다. 마포삼열은 평양에 대한예수교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교장이 되었는데, 제1회 졸업생으로 길선주, 양전백, 한석진, 이기풍, 서경조. 송인서, 방기창의 7인이 7교회를 세우고 7노회를 만들어 한국의 초대교회가 자립하는데 커다란 기여를 한다. 조선인 목사와 장로가 배출됨에 따라 1907년에는 연합공의회 하에 평안, 경성, 전라, 경상, 함경의 다섯 지방공의회로 각 지방 공의회에서는 당회 위원을 선택하여 교회 사무를 처리하도록 한다.[5]

독립노회 시대[편집 | 원본 편집]

1903년 원산에서 남감리회 선교사 로버트 하디에 의해 부흥이 일어난 이래로 사경회와 회개운동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는데, 1907년 1월 14일에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길선주의 공개 회개로부터 기념비적인 평양대부흥이 시작된다. 이후 1907년 9월 17일 오전 9시에는 사장로회 선교본부로부터 허가를 받아 장대현교회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노회가 조직되었는데, 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생들이 주축이 되고 이들이 목사로 안수받는다. 이로써 선교회본부의 관할로부터 독립된 조선예수교장로회노회가 설립된다. 설립 기념사업으로 이기풍을 제주도에 선교사로 파송하였기 때문에, 지방공의회는 대리위원회로 이름을 바꾸어 평북, 평남, 황해, 경기, 충청, 전라, 경상, 함경의 일곱 대리회를 설치한다.[5]

1909년에는 최관흘 목사를 블라디보스토크(해삼위)에, 평양여전도회에서는 이선관을 제주도에 선교사로 파견하고, 평양숭실학교에서는 김형재를 마찬가지로 제주도에 파견하였으며 한석진 목사를 일본 도쿄에 파견하여 재일조선인들에게 전도하도록 했다. 이 때부터 예수교회보를 발간하였다.[5]

총회 설립[편집 | 원본 편집]

지금까지의 일곱 대리회를 노회로 변경하고 7노회가 합동하여 총회를 조직한 후 1912년 9월 1일 1912년에는 제1회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가 평양에서 성립되어 헌법, 정치를 제정하였다.[2][4] 이를 기념으로 외국 전도를 시작하기로 하고 중국 산둥성 내량현에 선교사를 파견하고 1916년 경상노회를 경남과 경북노회로, 평북노회를 평북과 평서노회로 분리하였다.[5]

1934년 기준으로 미국 북장로 선교국에서는 당시 25개국에 선교를 하는데 그중 조선교회가 차지하는 비중은 교회수 40%, 목사수 40%, 세례교인 28%, 주일학생수 37%, 학교수 17%, 학도수 20%, 자급교회수 87%로 급상하게 되고 특히 지방에 교회가 많이 분포하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당시 218군 2493면 28240동리에 3000여개의 교회가 있었으니 1개 면, 50동리당 교회 1개의 비율이 만들어졌다.[2]

총독부와의 갈등과 신사참배[편집 | 원본 편집]

1919년 3.1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등 장로교는 애국적인 활동에 열심이었으나, 중일전쟁(1937년)을 전후로 일제가 기독교에 대하여 신사참배를 본격적으로 강요하자 신사 참배 문제로 조선총독부와 마찰이 발생한다. 그러나 이듬해 열린 제27차 총회(1938년)에서 신사참배를 수용할 것을 결의하면서 일제에 찬동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던 미션공의회 소속 선교사들은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를 자진해서 폐교하였고, 이를 계기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1940년에 설립한 평양신학교는 일제 황민화 교육을 실시하는 등 일제의 통치에 부합한 보이기도 하였다.

일본에서는 1939년에 '종교단체법'을 공포하여 종교단체가 국가적인 전시체제에 순응할 수 있도록 통폐합하는 조치를 취하였고, 일본 내의 모든 개신교 교단들이 1941년 '일본기독교단(日本基督教団)'으로 통합되기에 이르렀다. 조선총독부도 조선의 각 개신교 교파를 통폐합하여 '일본기독교단'의 하부기관으로 두어 개신교를 통제하려는 정책을 수립하였다. 일제는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며 미국과 대립하자 통폐합 정책을 급속하게 추진하였고, 그에 따라 1942년 1월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일본기독교조선교구회, 구세군 등 5개 기독교 교파의 대표들이 모여 '교파합동준비위원회'를 개최하였다. 교파 통합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감리교 측과 장로교 경성노회(경기노회)가 연합하여 '유대 사상'을 없애기 위해 구약성경을 폐기하는 '혁신안'을 제출하면서 '조선기독교혁신교단'이라는 명칭의 통합교단을 조직하였으나, 각 교파 내부의 반발로 혁신교단이 해체되면서 교파 합동 시도가 결렬 되었다.

단일 교단으로 통폐합 시켜 개신교를 장악하려던 시도가 결렬되자, 일제는 각 개신교 교파를 개별적으로 먼저 일본 기독교에 예속시키려는 시도로 전환하였고, 그에 따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는 1942년 10월 16일에 개최된 31회 총회를 끝으로 해산되었다. 그 후 장로교는 1943년 5월에 채필근을 통리로 하여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을 새롭게 창설하였고, 감리교는 그해 10월 '일본기독교조선감리교단'을 창설하면서 일제는 두 개의 큰 교단을 일제의 통제 하에 두게 되었다.

이후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은 1945년 6월부터 다시 개신교 교파들을 단일 교단으로 통합하는 시도를 시작하였고, 1945년 7월 19일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이 조직되며 다른 개신교 교파들과 함께 완전 통합되었고, 조선총독부는 장로교 출신의 김관식을 교단의 초대 통리로 임명하였다.

해방 후 분열사[편집 | 원본 편집]

1945년 일제 패망 후 장로교회 재건에 대한 논의가 지속된 이래, 남북 분단의 상황에서 남측의 장로교 교인들만으로 1947년 총회를 다시 시작하였고, 1949년대한예수교장로회로 명칭을 변경했다.

1952년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신사참배 저항 목회자들이 총회에서 제명당한 것을 계기로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이 출범하였고,[6] 1953년에는 성서비평학을 받아들이는 진보적 장로교 계열이 한국기독교장로회조선신학교(한신대학교)를 조직하여 분열해 나갔다. 1959년 세계 교회 협의회 가입을 둘러싼 의견 대립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으로 갈라졌다. 이후 1961년 김치선 목사를 중심으로 하는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이 분립했고, 1974년 제24회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총회에서 신자간에 일반 법원에서의 고소가 가능하다고 가결한데서 빚어진 교리의 신학적인 변질과 교회행정 문제에 항의한 것이 문제가 되어 고신측 총회에서 분리되어 나온 반고소 고려파가 대한예수교장로회(고려)총회를 세워 나간 뒤로 대한민국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교단은 170여 개[7]에 이른다. 2000년대 이후, <스코틀랜드 장로교 전통>의 역사적 계승을 선언한 한국예수교장로회가 새로이 2012년 1월에 출범했다. 이러한 장로교회의 분열상에 대해 복음주의 신학자 김명혁 목사(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는 그 자신이 장로교 성직자임에도 한국장로교의 분열은 자기에게 집중하는 인간의 이기적인 본성과 독선에 따른 일이며,이제라도 한국장로교회는 교제와 협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8] 그러나 장로교회의 이념은 성경 '진리'와 개혁주의 교리안에서 하나가 되어야만을 강조한다.

장로교 교단별 교세[편집 | 원본 편집]

참고자료[편집 | 원본 편집]

  • 김수진 (2005년 9월 20일). 《총회를 섬겨온 일꾼들》.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ISBN 8939806433. 

같이 보기[편집 | 원본 편집]

각주[편집 | 원본 편집]

  1. 1.0 1.1 1.2 김만형 (1934년 9월 7일). “宣敎五十週年맛는 長老會懷舊錄”. 조선일보. 
  2. 2.0 2.1 2.2 2.3 정인과 (1934년 6월 28일). “朝鮮長老敎會의今昔 可驚할五十年發達史 (中)”. 동아일보. 
  3. 3.0 3.1 3.2 김만형 (1934년 9월 8일). “宣敎五十週年맛는 長老會懷舊錄 (二)”. 조선일보. 
  4. 4.0 4.1 김만형 (1934년 9월 9일). “宣敎五十週年맛는 長老會懷舊錄 ㈢”. 조선일보. 
  5. 5.0 5.1 5.2 5.3 김만형 (1934년 9월 10일). “宣敎五十週年맛는 長老會懷舊錄 ㈣”. 조선일보. 
  6. 이 교단은 1960년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과 결합하였으나 신학적인 견해 차이 및 신학교 통폐합에 대한 의견 대립으로 1963년 환원하였다.
  7. 이중에는 개신교계에서 이단으로 판정되어 소속 교단에서 제명된 교회가 자체적으로 만든 비성경적인 장로교단도 포함된다.
  8. 뉴스 앤 조이 2006년 3월 31일자,김명혁 목사, “화해, 균형, 조화를 추구하며"
  9. https://www.cts.tv/news/view?ncate=THMNWS01&dpid=254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