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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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科學, 영어: science)은 최대한 검증 가능한 방법으로 구성된 체계적인 지식이다. 이때 최대한 검증 가능하다는 뜻은 과학적 방법론을 구사하여 구축했다는 것인데, 오늘날의 과학, 특히 물리학이나 화학은 점점 더 검증하기 힘들어지고 있다. 초끈이론이 위기에 처한 것도 검증 문제 때문이다. 생물학의 경우, 윤리적 문제가 도마에 자주 오른다. 가령 유전자 편집기술이 존재하고 마음만 먹으면 모기를 멸종시킬 수도 있지만, 그 여파가 생태계에 어떻게 작용할지 알 수 없어서 실행에 옮기지 않고 있다. 이미 인류가 절멸시킨 동식물이 아주 많다. 모기를 멸종시킵시다. 모기는 나의 원수. 또한 GMO가 과연 안전한지에 대해서도 곳곳에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질소비료는 두렵지 않나? 하지만 환경오염은 확실한 걸. 그렇더라도 과학 발전은 멈출 수 없다. 과학은 군사 기술이나 의료 기술 등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효용성은 다른 것보다도 체감하기 쉬운 편이다.

사람들이 흔히 과학이라고 부를 때는 자연과학을 일컫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본 문서도 자연과학에 중점을 두고 서술한다.

역사[편집 | 원본 편집]

과학의 역사는 아주 유구하지만, 실질적으로 고도로 발전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이게 다 아리스토텔레스 때문이다.

과학의 발전은 실수나 운이 작용한 경우도 상당히 많지만, 어디까지나 과학자가 끈질긴 탐구정신을 발휘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과학적 방법[편집 | 원본 편집]

과학의 장점은 그것을 믿든 안 믿든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이다.
 
— Neil deGrasse Tyson


과학의 최대 강점. 과학에서 가설이 아니라 정립된 이론은 믿든 안 믿든 진실이다. 과학을 부정하려고 할수록 음모론 따위의 사이비 과학에 경도되기 십상이다. 대부분의 음모론은 검증을 통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음모론도 있어서 골치 아프다. 진실로 밝혀진 음모론은 아이러니하게도 거짓인 음모론에 힘을 실어준다.

과학적 방법은 대체로 가설을 수립하고 이를 검증하는 식으로 실시된다. 이때 실험 설계가 제대로 되지 않거나 측정이 제대로 되지 않거나 상관관계와 인과관계를 혼동하는 오류를 범하는 경우, 가설은 제대로 될 때까지 다시 검증되어야 한다. 누구나 현상을 관찰할 수 있지만, 누구나 가설을 세워서 검증하려고 덤비진 않는다. 또한 틀린 가설을 과감하게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렇기에 과학자가 세상에 존재하는 한, 세상이 과학자를 지원하는 데 인색하지 않은 한, 설령 반지성주의의 광풍이 휘몰아쳐도 인류의 미래는 어두워질 수 없다.

수학과의 연관성[편집 | 원본 편집]

과학은 어느 순간부터 수학과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수학을 아는 사람은 과학에도 어느 정도 조예가 있고, 과학을 아는 사람도 수학에 어느 정도 조예가 있다. 물리학은 물론이고, 생물학에도, 사회과학에도 수학은 상당히 많이 쓰인다. 고전역학으로 모든 세계를 설명할 수 있다고 여겼을 시절에 비해서 양자역학의 부상으로 확률론이 몹시 중요해졌다.

철학과의 연관성[편집 | 원본 편집]

고대에는 철학자가 과학자를 겸하기도 했다. 그러나 과학이 고도로 발달하면서 과학자는 철학자를 겸하기 어려워졌다. 그렇지만 철학은 여전히 중요하다. 과학과 철학이 접목된 분야가 바로 과학철학이다.

패러다임[편집 | 원본 편집]

철학을 위해 역사를 연구한 물리학자인 토마스 쿤은 과학 혁명의 구조를 출판했다.

과학이 아닌 것[편집 | 원본 편집]

들어맞기만 하면 무조건 과학인가?[편집 | 원본 편집]

가령 용한 점쟁이가 매일 날씨를 맞추거나 월드컵 우승팀을 예언해서 전부 맞췄다고 치자. 이 점쟁이를 과연 과학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마도 이 문서를 읽는 모두가 그건 아니라며 황당해할 게 분명하다. 어째서 점쟁이는 과학자로 불릴 수 없을까? 점쟁이가 과학적 방법을 쓰지 않았지 때문이다.

논리적이면 무조건 과학인가?[편집 | 원본 편집]

과학은 상당히 체계화되어 있다. 따라서 고도로 논리적이다. 그런데 앞서 점쟁이가 월드컵 우승팀을 논리적으로 예측했다고 치자. 이 경우 이는 과학이 될 수 있는가? 그렇더라도 과학이라고 부를 수는 없으리라.[1]

역설적인 과학의 위상[편집 | 원본 편집]

과학의 위상은 아이러니하게도, 비과학적인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과학적으로 증명되었다거나 증명할 수 있다고 우기는 데서 극명히 유추할 수 있다. 과학의 위상이 높지 않으면 과학적으로 증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딴 주장이 과학기술의 정수 중 하나인 인터넷을 통해 세계적으로 퍼진다.

과학이 답을 내려줄 수 없는 것[편집 | 원본 편집]

과학은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사실에 관한 학문이지만, 사람이 어떤 가치관을 견지하고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말해줄 수 있는 게 없다. 이런 걸 알고 싶다면 철학 같은 인문학을 해야지. 과학기술의 진보를 위해 많은 투자가 필요하다는 것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이는 사회과학을 모두 포함하더라도 마찬가지다. 가령 경제학은 모든 사람에게 자유주의자가 되어라거나 사회주의자가 되어라는 교훈은 없다.

분류[편집 | 원본 편집]

각주[편집 | 원본 편집]

  1. 월드컵 우승팀을 논리적으로 예측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결승에 오른 A팀과 B팀 중 A팀 또는 B팀이 우승한다.” 혹은 “월드컵에 출전하는 팀 중 적어도 한 팀은 반드시 우승한다.” 황당하겠지만, or을 계속 쓰면 어느 하나는 들어맞을 수밖에 없으므로 설득력은 떨어질지언정 비논리는 아니다. 내일 날씨를 예측할 때도 적용된다. 내일 날씨는 맑거나 흐리거나 비가 올 것이라는 식으로 예측하면, 이 중 적어도 하나는 반드시 맞다. 그러나 사람들은 흔히 예측은 수많은 발생 가능한 상황 중 높은 확률의 상황이 미래에 발생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므로 이는 예측이 아니라고 여길 것이다. 또한 예언은 불확실한 미래에 관해서 단 하나의 상황을 확정하는 것으로 여기므로 앞의 두 진술은 일반인에게는 예측도, 예언도 아닌 것으로 비치기 쉽다. 일반인에게는 수많은 경우의 수를 남발하여 빗나가지 않는 결과가 도출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설령 조금 빗나가더라도 나올 결과의 범위를 유의미하게 줄이는 게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듯하다. 경우의 수를 남발하면 예측하는 의미가 없을뿐더러 약간의 오차는 허용가능하기 때문이다.
  2. 지구평평설 따위를 진지하게 믿는 걸 과학이라고 생각하는 한심한 부류다. 이는 과학이 절대로 아니다. 불편한 진실을 못 받아들이는 사람이 쉽게 빠져든다.